정부가 추진하는 일차의료 사업에서 한의원 참여가 제한된 것을 두고 대한한의사협회가 의과 중심으로 설계된 보건의료정책을 전면적으로 손질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한의협은 현재의 의료제도가 일제강점기에 한의학을 제도권 의료에서 배제한 구조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의과와 한의과가 균형을 이루는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한한의사협회는 제81주년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 성명을 내고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져 온 양방 일변도의 보건의료제도를 이제는 깨끗하게 청산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의협은 대한제국 시기에는 한의와 서양의학을 다루는 의사가 국가 의료체계 안에서 함께 활동했다고 설명했다. 궁내부 내의원과 전의감 등에 두 분야 의료인이 함께 임용됐고, 한약과 서양 의약품을 병행하는 의료체계도 운영됐다는 것이다.
한의협은 일제의 침탈이 본격화되면서 한의학이 국가 의료체계에서 배제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한의와 서양의학이 함께 운영되던 광제원이 폐지됐고, 통감부가 설치한 대한의원에서는 한의가 제외됐다고 설명했다.
1913년 조선총독부가 제정한 "의생규칙"도 근거로 제시했다. 한의협은 이 규칙을 통해 한의사가 의사가 아닌 "의생"으로 분류됐고, 서양의학 교육을 받은 사람에게만 의사라는 지위와 명칭이 부여됐다고 지적했다. 이어 1944년 의생제도까지 폐지되면서 한의학이 근대 의료체계의 중심에서 밀려났다는 것이 한의협의 주장이다.
광복 이후인 1951년 국민의료법이 제정되면서 한의사 제도가 다시 법제화되고 한의사가 의료인에 포함됐다. 그러나 한의협은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의과 중심의 제도와 정책 설계 방식은 광복 이후에도 상당 부분 이어졌다고 평가했다.
한의협은 이러한 문제가 현재 정부의 보건의료사업에서도 반복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대표 사례로 보건복지부가 오는 9월 시행을 준비 중인 "지역사회 일차의료 혁신 시범사업"을 들었다.
이 사업은 50세 이상 주민이 동네 의료기관에서 질병 치료뿐 아니라 예방과 건강관리, 돌봄 연계까지 받을 수 있도록 하는 한국형 일차의료 체계를 구축하는 내용이다. 의사와 간호사, 물리치료사, 영양사, 사회복지사 등이 다학제팀을 구성해 환자별 건강관리계획을 수립하고 지속적으로 관리한다.
복지부는 공모 당시 진료과목에 따른 참여 제한이 없다고 설명했지만 참여 대상을 사업 요건을 갖춘 "의원 또는 거점지원기관"으로 정했다. 의료법상 의원과 한의원은 별도의 의료기관 종별로 구분되기 때문에 한의원은 참여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한의협은 "한의원이 지역사회 일차의료기관으로 국민 건강을 돌보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데도 정부는 시범사업 참여를 막고 있다"며 "새로운 보건의료사업을 설계할 때 한의사의 참여 가능성을 처음부터 배제하는 행태가 반복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광복 81년이 지난 지금까지 일제강점기에 시작된 의과 중심의 의료제도와 사고방식이 국가 보건의료정책에 남아 있는 상황을 바로잡아야 한다"며 보건복지부에 의과와 한의과가 균형을 이루는 정책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이번 성명은 한의학의 역사적 지위를 넘어 정부 재정이 투입되는 의료·건강관리 사업에 한의사와 한의원을 어디까지 참여시킬 것인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앞으로 시범사업 참여 직역을 확대할지와 의과·한의과의 역할을 어떤 기준으로 구분할지가 보건의료정책 논의의 쟁점으로 남게 됐다.
이수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