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당국이 가계대출 총량 관리의 문턱을 낮추면서도 자금 용도에 따라 규제 강도를 달리하는 방식으로 대출 관리에 나섰다. 제2금융권의 중금리대출 증가분을 가계대출 총량에서 전액 제외하고 이주비·중도금·잔금 등 집단대출도 별도로 관리한다. 반면 일반 주택담보대출은 관리 대상에 그대로 두면서 은행권에서는 다시 대출 문턱을 높이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23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감독원은 지난 21일 저축은행과 여신전문금융회사, 상호금융 등 제2금융권 관계자들을 불러 부동산 금융 종합대책 후속 조치 방향을 설명했다.
핵심은 중·저신용자와 주택 실수요자에게 공급되는 대출을 일반 가계대출과 분리해 관리하는 것이다.
금융당국은 8월부터 제2금융권이 취급하는 민간 중금리대출 증가분을 금융회사별 가계대출 총량 관리 실적에서 100% 제외하기로 했다. 기존에는 저축은행의 경우 증가분의 80%, 여신전문금융회사는 40%까지만 총량에서 제외했지만 이달부터는 상호금융까지 포함해 전액을 빼준다.
중금리대출은 일정 금리 기준을 충족하면서 신용점수 하위 50% 차주에게 공급하는 상품이다. 은행권 대출을 이용하기 어려운 중·저신용자가 주요 대상이다.
총량에서 제외한다는 것은 금융회사가 중금리대출을 늘려도 해당 증가액이 회사에 배정된 가계대출 한도를 소진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금융회사 입장에서는 총량 규제 때문에 중금리대출 취급을 줄여야 할 부담이 그만큼 사라진다.
금융당국이 이 같은 조치를 내놓은 것은 가계대출을 일률적으로 억제하는 과정에서 신용도가 낮은 차주의 자금줄부터 막히는 현상을 줄이기 위해서다.
실제 저축은행의 올해 상반기 중금리대출 취급액은 4조9080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6조3272억원보다 22.4% 감소했다. 다만 중금리대출 증가분의 80%를 총량에서 제외하기 시작한 이후 올해 2분기 취급액은 2조7496억원으로 1분기보다 약 27% 늘었다.
금융당국은 중금리대출뿐 아니라 사잇돌대출과 중금리 생활안정대출 등 정책성 상품의 공급도 확대하도록 제2금융권에 주문했다.
주택 실수요자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는 집단대출도 총량 규제에서 별도로 떼어낸다.
이주비와 중도금, 잔금대출 등 8월 이후 증가한 집단대출은 금융회사별 가계대출 총량 관리 실적에 반영하지 않는다. 신축 아파트 입주 과정에서 잔금대출을 확보하지 못하거나 재건축·재개발 현장에서 이주비 대출이 막히는 문제를 줄이기 위한 조치다.
규제를 풀자 은행권 집단대출은 빠르게 늘었다.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 등 5대 은행의 집단대출 잔액은 지난 20일 기준 148조9823억원으로 집계됐다. 7월 말 148조2425억원과 비교하면 불과 20일 만에 7398억원 증가했다.
지난 7월 한 달 동안 5대 은행의 집단대출 증가액은 6530억원이었다. 8월에는 월말까지 열흘 이상을 남겨둔 20일 기준으로 이미 전월 전체 증가액을 약 900억원 넘어섰다.
정부의 8·13 부동산 금융 종합대책 이후 은행들의 대출 운용 방식도 달라졌다.
정부는 올해 가계대출 증가율 관리 목표를 기존 1.5%에서 3.0%로 높였다. 금융권 전체로 약 30조원의 추가 대출 여력이 생기는 규모다. 이 가운데 이주비·중도금·잔금 등 집단대출은 금융회사별 총량 목표에 얽매이지 않도록 별도로 관리하기로 했다.
은행들도 집단대출 확보에 움직이고 있다. 서울 서초구 "디에이치방배" 잔금대출의 경우 주요 은행들이 대출 한도를 기존 1000억원에서 3000억원 이상으로 확대하는 등 신규 입주 단지를 둘러싼 집단대출 경쟁도 나타나고 있다.
전체 가계대출 증가 역시 주택 관련 대출이 이끌었다.
5대 은행의 가계대출 잔액은 20일 기준 780조4863억원으로 7월 말보다 1조5072억원 증가했다. 이 가운데 집단대출을 포함한 주택담보대출은 619조4444억원으로 같은 기간 1조5033억원 늘었다. 이달 가계대출 증가액의 대부분이 주택담보대출에서 발생한 셈이다.
반면 마이너스통장을 포함한 신용대출은 같은 기간 71억원 감소했다. 주택 관련 대출로 자금이 몰리는 동안 일반 신용대출은 오히려 소폭 줄었다.
집단대출이 빠르게 증가하면서 일반 주택담보대출에 대해서는 은행들이 다시 문턱을 높이고 있다. 금융당국이 모든 주담대를 총량 관리에서 제외한 것이 아니라 이주비·중도금·잔금 등 실수요 성격의 집단대출에만 예외를 적용했기 때문이다.
일반 주택담보대출과 신용대출은 기존 총량 관리 체계에 그대로 남는다. 은행 입장에서는 집단대출을 늘리면서 전체 가계대출 증가 속도까지 관리해야 해 일반 주담대의 한도와 취급 조건을 조절할 필요성이 커졌다.
제2금융권에서도 모든 대출의 빗장이 풀리는 것은 아니다. 총량에서 빠지는 것은 중금리대출과 정책적으로 예외를 인정받은 대출이다. 일반 신용대출과 고금리 대출 등은 기존 관리 체계가 유지된다.
대출 공급을 늘려야 하는 금융회사들의 부담도 남아 있다. 저축은행과 카드·캐피털사가 중·저신용자 대출을 확대할 경우 연체율과 부실 위험을 함께 떠안아야 한다. 총량 규제가 사라져도 조달금리와 자본 여력, 차주의 상환 능력을 따져 실제 대출 규모를 결정할 수밖에 없다.
상호금융의 상황은 더 복잡하다. 농협·신협·새마을금고의 집단대출 잔액은 올해 상반기에만 3조100억원 증가해 6월 말 38조1500억원까지 불어났다. 지난해 가계대출 관리 실적에 따라 올해 신규 대출에 제한을 받고 있는 곳도 있어 추가 대출 여력은 금융회사마다 차이가 날 수 있다.
금융당국도 집단대출을 총량에서 제외하는 동시에 증가 속도는 계속 점검하기로 했다. 특히 8월과 9월 대출 흐름을 살펴 특정 지역이나 단지에 자금이 과도하게 몰리는지 확인할 방침이다.
결국 대출 규제는 한쪽에서는 풀고 다른 한쪽에서는 조이는 구조가 됐다. 중·저신용자를 위한 중금리대출과 입주·재건축 등에 필요한 집단대출에는 길을 열어주면서 일반 주담대와 신용대출은 계속 총량 안에서 관리한다.
문제는 속도다. 집단대출은 규제 완화와 맞물려 5대 은행에서 불과 20일 만에 7398억원 늘었다. 중금리대출까지 총량에서 완전히 빠지면서 금융회사의 대출 여력도 커진다. 실수요자의 막힌 자금줄을 풀면서 주택 관련 대출이 다시 가계부채 급증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관리해야 하는 부담이 동시에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