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콘텐츠와 K-푸드가 세계 시장에서 하나의 문화 코드로 자리 잡은 지금, 전통의학 분야에서도 비슷한 질문이 던져지고 있다. “왜 K-한약은 아직 글로벌 브랜드가 되지 못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굳이 멀리 갈 필요는 없다. 답은 이미 대만에서 실험되고 있고, 상당 부분 성공하고 있다.
최근 열린 국제동양의학학술대회는 전통의학이 더 이상 학문 내부의 담론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학회 개막식에 라이칭더 총통이 직접 참석한 장면은 상징적이었다. 대만에서 전통의학은 ‘보존의 대상’이 아니라 ‘국가 전략 산업’이다. 정부 수반이 나서서 연구개발과 임상 제도를 지원하겠다고 선언하는 순간, 전통의학은 정책의 주변부가 아닌 중심으로 이동한다.
대만 모델의 핵심은 단순하다. 임상과 표준은 국가가 책임지고, 연구 성과를 산업으로 구현하는 역할은 민간이 맡는다. 이 구조의 중심에 국가중의약연구소가 있다. 이 기관은 한약제제의 임상 연구와 가이드라인을 총괄하며, 개별 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국제 기준 대응을 대신 수행한다. 제약사는 이 검증된 틀 안에서 생산과 수출에 집중한다. 결과적으로 전통의학은 ‘신뢰 가능한 의약품’의 언어로 세계 시장에 진입할 수 있었다.
이 체계에서 탄생한 대표 사례가 한약 기반 코로나19 치료제다. 대만은 팬데믹 국면에서 백신만이 아니라 치료제 개발을 국가 전략으로 선택했다. 과학적 임상과 엄격한 품질 관리, 그리고 정부 차원의 제도적 지원이 결합되자 전통의학은 위기 대응 수단으로 작동했다. 이후 해당 치료제는 세계보건기구의 권고를 받으며 수십 개국으로 수출됐다. 전통의학이 글로벌 공중보건의 언어로 번역된 순간이었다.
한국은 어떠한가. 연구 역량만 놓고 보면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 오히려 임상 경험과 의료 접근성, 데이터 축적 면에서는 더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공진단, 우황청심환, 경옥고처럼 이미 해외에서 브랜드 인지도가 형성된 한약제제도 존재한다. 외국인 환자 수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고, K-콘텐츠를 통해 접한 한의학 체험은 실제 의료 소비로 이어지고 있다. 수요는 분명히 있다.
문제는 이 모든 요소를 하나로 묶는 구조가 없다는 점이다. 한약 전용 임상시험 인프라가 부재해 국제 규제기관이 요구하는 다국적 임상으로 확장하기 어렵고, 수출 통계조차 건강기능식품이나 화장품 범주에 섞여 산업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다. 연구개발 예산은 여러 부처에 분산돼 장기 전략을 설계하기 힘들다. 세계화를 말해왔지만, 실행을 위한 제도는 선언적 수준에 머물러 있다.
안전성 논란 역시 과학적 데이터로 상당 부분 해소되고 있다. 대규모 환자 데이터를 분석한 연구들은 표준화된 제조와 관리가 전제될 경우 한약제제가 고위험군에서도 충분히 안전하게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전통이어서 불안하다’는 인식을 ‘과학적 관리 하에 안전하다’는 언어로 전환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다. 문제는 이 근거를 국제 규제기관이 요구하는 형식으로 체계화해 제출할 수 있는 창구가 없다는 데 있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선언이 아니다. ‘한의약 임상연구 컨트롤타워’다. 원료 표준화, 임상시험 설계, 실사용근거 축적, 약물감시 데이터 관리, 국제 규제 대응까지를 하나의 흐름으로 묶는 기관이 필요하다. 대만의 NRICM처럼, 이 컨트롤타워는 개별 기업이나 학회의 이해를 넘어 국가 차원의 전략을 실행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K-한약의 세계화는 문화 수출의 연장선이 아니다. 그것은 보건·의료 산업 전략의 문제이며, 국가 신뢰도의 문제다. 전통의학을 어떻게 관리하고, 어떻게 과학으로 번역하며, 어떻게 세계에 설명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다. 대만은 이미 그 답을 제도화했다. 한국은 더 많은 자원을 가지고도 아직 출발선에서 망설이고 있다.
‘K-한약 글로벌 스타트’는 먼 미래의 목표가 아니다. 세계의 관심은 이미 와 있고, 필요한 재료도 모두 준비돼 있다. 남은 것은 구조를 만들 결단이다. 그 결단이 내려지는 순간, 한약은 국내 의료의 한 축을 넘어 한국이 세계에 제시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전략 산업으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