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대한 부를 일군 기업인과 유명인들이 재산을 자녀에게 그대로 물려주는 대신 교육과 의료, 복지 등 사회문제 해결에 내놓은 사례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들의 선택은 높은 사회적 지위에 상응하는 책임을 뜻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표적인 실천으로 평가받는다.
국내에서는 유한양행 창업자 고 유일한 박사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경영 구조로 남긴 인물로 꼽힌다. 유 박사는 개인이 보유한 유한양행 주식을 교육·공익기관에 기부하고 유한재단과 유한학원을 세워 기업의 이익이 장학·교육·복지사업으로 이어지도록 했다.
1963년에는 유한양행 주식 1만2천주를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기부했다. 당시 전체 발행 주식의 5%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유 박사가 남긴 사회환원 구조는 사후에도 이어져 유한재단과 유한학원이 장학·교육사업을 운영하는 기반이 됐다.
면세점 DFS를 공동 창업한 미국계 아일랜드인 사업가 척 피니는 재산을 살아 있을 때 모두 나누는 “기빙 와일 리빙”을 실천했다. 그는 애틀랜틱 필랜스로피를 통해 약 80억달러를 교육과 의료, 인권, 평화사업에 지원했다. 재단은 기금을 영구 보존하지 않고 모두 사용한다는 방침에 따라 2020년 활동을 종료했다. 피니가 개인 생활을 위해 남긴 돈은 전체 재산의 극히 일부였다.
고 이종환 삼영화학그룹 명예회장은 2000년 관정이종환교육재단을 설립하고 생전에 약 1조7천억원을 출연했다. 재단은 국내외 장학생을 선발하고 특히 자연과학과 이공계 인재 양성에 집중해 왔다. 이 전 회장은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신축에도 600억원을 기부했다.
고 정문술 미래산업 창업자는 “부를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뜻에 따라 KAIST에 두 차례에 걸쳐 515억원을 기부했다. 2001년 300억원을 내놓은 데 이어 2014년 215억원을 추가로 기탁했다. 기부금은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와 문술미래전략대학원 설립 등에 사용됐다.
진주에서 한약방을 운영한 김장하 전 남성문화재단 이사장은 평생 모은 재산으로 학교를 세우고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지원했다. 1991년 사재로 설립한 명신고등학교를 국가에 헌납했으며, 2021년 남성문화재단을 해산하면서 남은 재산 34억5천만원을 경상국립대학교에 기탁했다. 김 전 이사장의 “줬으면 그만이지”라는 말은 대가와 명예를 바라지 않는 기부 정신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알려졌다.
해외 영화계에서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선언이 이어졌다. 홍콩 배우 주윤발은 2018년 인터뷰에서 당시 56억홍콩달러로 알려진 재산을 사후 자선단체에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돈은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배우자인 진회련도 자신의 결정을 지지한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는 이미 전액 기부를 완료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후 기부 계획을 밝힌 것이다.
배우 성룡도 2011년 재산을 아들에게 상속하지 않고 자선사업에 사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아들이 능력이 있다면 스스로 돈을 벌 수 있고, 그렇지 않다면 물려받은 재산을 낭비할 것이라는 취지로 상속에 대한 생각을 설명했다. 이 발언 역시 당시 밝힌 계획으로, 실제 재산 처분이 모두 완료된 것으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세계적인 투자자 워런 버핏은 생전 또는 사후에 재산의 99% 이상을 사회에 내놓겠다고 약속했다. 버핏은 자신과 가족이 필요한 것보다 많은 재산을 사용하는 것은 행복을 더하지 못하지만, 나머지 99%는 다른 사람의 건강과 복지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밝혔다.
마이크로소프트 공동 창업자 빌 게이츠도 자녀에게 전체 재산의 1% 미만을 상속하겠다는 방침을 공개했다. 자녀들이 막대한 상속재산에 의존하기보다 스스로 성취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재산 대부분은 재단을 통해 보건의료와 빈곤 퇴치 등 공익사업에 사용한다는 구상이다.
이들의 기부는 규모와 방식, 이행 시점에서 차이가 있다. 생전에 출연을 마친 사례가 있는가 하면 사후 기부를 약속했거나 재단을 통해 장기간 재산을 배분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부를 개인과 가족의 소유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사회가 함께 활용할 자원으로 전환했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주민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