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이 본격적으로 시행되면서 시장 내 투자자 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마련되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불공정 거래에 대한 감시 체계가 강화되고 가상자산 사업자들의 내부통제 기준이 상향되면서 시장의 투명성은 한층 제고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시장 안정화라는 기초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으며 산업 전반의 성장 방향을 제시할 디지털자산기본법은 여전히 입법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기술과 시장의 발전 속도를 제도가 따라잡지 못하는 지체 현상이 지속되면서 산업 현장에서는 글로벌 경쟁력 약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올해 블록체인 업계의 최대 화두는 단연 스테이블코인이었다. 디지털 환경에서 가치 변동성을 최소화한 스테이블코인은 단순한 가상자산을 넘어 차세대 결제 및 정산 시스템의 핵심 요소로 급부상했다. 특히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의 도입 여부를 두고 금융 당국과 정치권, 그리고 산업계 간의 복합적인 이해관계가 충돌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국내 결제 시장의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카드이지만 통화 안정성과 통화 정책의 유효성을 우려하는 중앙은행의 입장과 맞물려 정책적 합의점을 도출하는 데 난항을 겪고 있다.
전문가들은 스테이블코인 제도의 부재가 단순한 국내 산업의 정체를 넘어 글로벌 주도권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미국이 지니어스법 등 관련 입법을 통해 디지털자산 시장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내 제도 마련이 늦어질 경우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이 국내외 결제 시장을 잠식하는 이른바 디지털 달러 헤게모니에 종속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정구태 인피닛블록 대표는 입법부가 스테이블코인 관리의 필요성에는 공감하고 있으나 한국은행이 우려하는 통화 정책의 영향력 문제가 핵심 쟁점이라고 분석하며 준비자산 관리와 환매 구조에 대한 안전장치가 전제된다면 조속한 정책 추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가오는 2026년 블록체인 시장의 핵심 키워드는 실물자산 토큰화(RWA)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RWA는 국채, 부동산, 금 등 유형의 자산을 블록체인상에서 토큰화하여 유통하는 개념으로 기존 금융 시스템의 비효율성을 개선할 혁신적 도구로 주목받고 있다. 2025년까지가 기술적 가능성을 검토하는 실증 단계였다면 2026년은 실제 금융 상품이 시장에 출시되어 대중화되는 원년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미 글로벌 금융 대기업들이 퍼블릭 블록체인을 활용한 상업어음 발행과 정산 시스템 구축에 나선 만큼 국내에서도 금융 자산의 토큰화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인공지능(AI) 기술과의 융합 또한 가속화될 전망이다. 가상자산 거래의 이상 징후를 실시간으로 탐지하고 자금세탁 방지(AML) 업무의 정밀도를 높이는 데 AI가 적극 활용되면서 블록체인 생태계의 신뢰도는 더욱 공고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기술적 완성도뿐만 아니라 운영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AI 인프라 도입은 향후 가상자산 사업자의 핵심 역량으로 평가받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러한 장밋빛 전망 뒤에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제도적 불확실성의 해소다. 2026년에는 지방선거 등 굵직한 정치적 일정이 예정되어 있어 입법 동력이 분산될 위험이 크다. 업계 관계자들은 완성도 높은 법안을 기다리기보다는 실현 가능한 수준에서 우선적인 제도를 마련하는 속도전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김성곤 한국블록체인산업진흥협회 이사는 제도적 공백이 길어질수록 국내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확보할 수 있는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고 언급하며 내년 상반기까지가 골든타임이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결론적으로 2025년은 블록체인 산업이 제도권 금융의 문턱에서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확인한 해였다.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사회적 의제가 설정되고 RWA라는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인한 성과가 있었으나 이를 뒷받침할 입법적 결단은 미완의 상태로 남았다. 2026년 병오년은 이러한 논의들이 실제 산업 구조로 정착될지를 결정짓는 중대한 분수령이 될 것이다. 속도감 있는 정책 집행과 민관의 긴밀한 협력이 전제될 때 비로소 대한민국 블록체인 산업은 글로벌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확보하고 진정한 디지털 금융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