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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 시대(송병민)

김미영 기자 | 승인 22-07-21 23:41 | 최종수정 22-07-21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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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톨레마이오스적 세계관’ 극복과 대항해시대

  역사는 돌고 돈다. 그리고 하나의 문명은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인류의 역사를 구분하는 여러 가지 구분이 있겠지만, 나는 인류의 역사는 ‘대항해시대’ 전과 후로 구분하고 싶다. 어느 시대마다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패러다임이 있지만, 대항해시대의 시작은 신 중심 ‘믿음’의 세상에서 독립된 주체적인 인간으로 ‘사고’하는 지점과 맞물린다. 

  지구 중심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관을 받아들인 중세는 지구가 천체, 특히 행성체계의 중심이라고 가정한 이론을 기독교 교리로 받아들였다. 이에 대한 부정은 종교재판으로 이어지고, 과학적 지식과 발전을 몰아냈다. 지구를 평평한 원반으로 인식했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도’에는 아시아의 동해안이 유럽과 아주 가깝게 그려지고 있다. 물론, 이 잘못된 지도가 나타내는 짧은 거리가 떠나는 결정을 쉽게 만들었고, 인도를 유럽 근처의 서쪽에서 찾으려 한 콜럼버스에게 판단의 오류를 범하도록 했지만, 대항해시대와 맞물려 우주 전체의 움직임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의 전환이 일어난다. 그런 까닭에 인간의 역사를 구분할 때 이런 무거운 통념을 벗어나는 ‘인간의 시도’를 기준으로 한다면 인간의 역사는 ‘대항해시대 전과 후’로 나누는 것은 의미가 있어 보인다. 

  역사적 큰 흐름을 시대, 공간, 인과관계로 명확하게 구분 지어 말하기는 어렵다. 역사적 현상은 다양한 시공간에서 여러 시대적 요인들의 복합적 인과관계의 작용으로 만들어진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런 거대한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기에 앞서 중세 ‘암흑의 시대’에 벌어진 몽골의 세계 정복으로 전달된 동양의 과학기술, 지식, 상업적 부는 잠든 유럽을 깨우며 르네상스를 연 원동력이 된다. 그리고 르네상스는 삶의 많은 부분을 변화시킨다. 

  역사는 어떤 면에서 아이러니한 결과의 중첩이다. 역설적인 것은, 문명의 파괴자가 그 파괴한 문명 위에 새로운 문명의 토대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경험은 사고의 전환을 가져온다. 특히 새로운 문물을 접함으로 인해 생긴 편리함은 인간을 쉽게 길들인다. 그리고 이런 물건에 대한 집착과 소유욕이 무역을 번성하게 하며 새로운 시대를 여는 원동력이 되었다. ‘후추’ 그랬고, ‘설탕’이 그랬다. ‘금’이 그랬고 ‘은’이 그랬다. ‘담배’가 그랬고, ‘커피’가 그랬다. 

  남송을 정복하며 ‘항구를 통해 이익을 얻는 상인’을 목격한 몽골이 대대적인 해상무역로 개척에 앞선 것이 그런 예다. 상인을 강도보다 한 단계 높은 계급으로 보던 중국과 달리 몽골은 상인의 지위를 최고지위 고급관료들 바로 아래 두었다. 반면 유학자들의 위치는 거지 바로 위 매춘부 바로 아래 둠으로써, 상인들의 가치를 인정하였다. 역사적으로 상인들을 대우할 때 나라가 부유해졌었다는 사실은 ‘조선’이 왜 그렇게 ‘힘없는 나라’가 될 수밖에 없었고,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말해준다. 

  ‘후추’로 설명되는 대항해시대의 시작은, ‘후추’에 길들어져 있음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길든다는 것은 무서운 것이다. 항해를 통한 세계질서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은 중세 ‘신’ 중심의 질서에서 벗어남을 뜻하지만, 동시에 ‘후추, 정향, 육두구’로 대표되는 향신료의 노예가 되어감을 뜻한다. 

  그래서, 역사를 구분하기 위한 여러 기준과 전제들 속에는 인간의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인식의 한계를 극복할 때마다 새로운 문명이 생겼고, 그런 도전이 사라지면 문명도 사라져갔다. 그러나 그 모든 인식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은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과 익숙한 것에 대한 욕망이 어우러진 결과라고 볼 수 있다.


2. 굴절적응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콜럼버스가 신대륙의 발견하는 과정은 여러 우연과 실수가 중첩된 결과다. 구텐베르크가 혁신한 인쇄기술은 포도주나 올리브유를 압착하는 기계가 본래의 목적과 다르게 활용된 것이며, 그로 인한 인쇄술의 발달은 콜럼버스가 세계지도를 얻고, 천문학을 공부할 수 있게 만들었다. 아버지가 선물로 준 세계지도와 미지의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바다에 대한 콜럼버스의 꿈을 키워줬을 것이다. 인도가 지금처럼 멀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인도를 찾아 떠나는 첫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래서 때로는 진실보다는 거짓이 열정을 품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콜롬버스가 도착한 곳은 본인이 생각했던 그곳은 아니었다. ‘후추’와 ‘금’을 찾아 떠난 그곳에서 ‘은’을 비롯한 보물과 옥수수·감자·호박·면화·토마토 등 새로운 작물과 마주치게 된다. 이 작물들은 식탁을 풍요롭게 했을 뿐 아니라 유럽에 만연한 기아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 아메리카 대륙을 찬찬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어떤 새로운 작물이 어떤 효용을 주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기 위해선 ‘근사탐색’이 필요하다. 새것이건 오래된 것이건 능동적인 탐구와 수동적 탐색이 동시에 필요하다.

  스티븐 제이 굴드와 엘리자베스 브르바가 고안한 ‘굴절적응’이란 진화 생물학적 개념이 있다. ‘하나의 생명체가 특정 용도에 적합한 한 가지 특성을 발전시키면, 다른 생명체들이 그 특성을 전혀 다른 기능으로 활용하는 현상’을 말한다. 원래의 기능과 새로운 기능 사이에 틈새,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 어떤 기능을 찾아내는 것을 말한다. 목표를 향해 나아갔으나 목표가 아니었던 것일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진 곳일 때도 있다. 

  콜럼버스의 ‘실수’에 의한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은 유럽의 역사에 있어서는 거대한 음식 창고가 준비된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거대한 창고의 음식은 열심히 찾는 이에게만 보이는 것이다. 수탈이라는 부정적 개념 뒷면에 관찰이라는 긍정적 태도가 숨어 있다. 관찰과 탐색이 없으면, 개발과 그로 인한 이익환수가 있을 수가 없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정복의 정당화만 극복되었더라면, 그리고 잔인한 노예무역과 전염병으로 촉발된 인구감소와 전통 문명의 붕괴를 피할 수 있었더라면, 차라리 ‘정화의 원정’과 그로 인한 ‘불교’문화의 세계적인 전파가 있었더라면 좀 덜 가혹한 역사를 낳았을는지 모른다. 문명은 충돌하는 듯 보이지만, 각자의 문화가 가진 폭력성을 중화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3. 문화의 칵테일과 인접 가능성 그리고 대항해시대의 도래

  낭만적인 여행에 대한 꿈과 이야기가 때로 새로운 시대를 열기도 한다. ‘천일야화’에 등장하는 <바다의 신밧드>는 바그다드의 부유한 상속자였던 신밧드가 방탕한 생활을 접고, 무역선을 사서 해외무역을 위한 일곱 번에 걸친 바다 여행을 하며 겪는 모험담이다. 페르시아만과 아라비아해에서 벵골만을 거쳐 남중국해를 오가며 펼쳐진다. 일곱 번의 바다 모험에서 말라바르 해안 도시를 방문하고, 스리랑카에서 무역하며, 수마트라·말라카 반도·싱가포르 항구에도 방문한다. 남서 계절풍을 타고 중국의 광둥까지 진출한다. 이는 소설적 상상력을 넘어 해양학적 관찰을 담은 일종의 항해지였다, 미지세계의 주민에 관한 교훈, 해적과 위험한 해역에 대한 경고, 항해술과 해로, 방문했던 항구의 관습에 대한 조언이 나온다. 

  시대의 흐름을 통찰하고 변화를 선도하는 선구자가 새로운 시대를 만들기도 하는데, 대항해시대 주역인 포르투갈의 젊은 왕자 ‘엔리케’는 새로운 지식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험의 열정으로 ‘항해 전문가 집단’을 구성한다. ‘사그레스 성’을 중심으로 항해기술자·천문학자·지도제작자·세공업자·탐험가 등 정보지식탐험 공동체를 만드는데 이는 포르투갈인이 다른 문화·종교·인종에 대한 ‘톨레랑스’를 길렀기 때문이다. 이런 열린 정신은 이교도이자 지배자였던 아랍인들의 지식과 기술을 도입하고 우수한 아랍의 학자들을 초빙하여 ‘문명의 칵테일’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암모니아, 메탄, 물, 이산화탄소, 약간의 아미노산, 기타 간단한 유기화합물 등 다른 분자들은 서로 충돌하면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결합을 만드는데, 과학자 스튜어트 카우프만은 이러한 1차적 결합들을 인접 가능성(adjacent possible)이라 불렀다. 

  인접 가능성은 창조적 잠재력을 이야기도 하지만 변화와 혁신의 한계도 동시에 암시한다. 인접 가능성은 우리에게 무한한 가능성의 첫 길을 열어준다. 문을 열 때마다 마법처럼 점점 넓어지는 집이 있다. 문이 4개 있는 방에서 시작해 각 문을 열고 나갈 때마다 가본 적 없는 새로운 방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4개의 방이 인접 가능성이다. 그러나 4개의 문 가운데 하나를 열고 방으로 가면 3개의 문이 새롭게 등장하고 그 문들은 모두 처음 시작했던 방에서는 접근할 수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방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렇게 문을 계속 열다 보면 결국 거대한 성을 만날 수 있게 된다.

  결국, 인접 가능성은 더 큰 세계를 ‘탐구’할 수 있는 혁신의 공간을 말하는 것이다. ‘엔리케’의 ‘사그레스 성’은 많은 생각이 충돌할 수 있는 인접 가능성이 큰 어떤 조건을 제공했던 것이고 이는 ‘바르카’에서 ‘카라벨’로의 혁신적인 도약, 그리고 세상의 끝으로 여겨졌던 ‘보자도르 곶’을 넘어서는 계기가 된다. ‘보자도르 곶’을 넘는 항해는 ‘미신’을 깨는 항해라는 점에서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역사적인 사건이지만, 아프리카라는 ‘미지의 대륙’ 입장에서는 약탈과 수탈, 노예무역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점에 슬픔이 있다.

 
4. 공진화와 해적의 역사

  프랑스와 영국이 서유럽의 패권을 놓고 ‘백년 전쟁’을 벌이고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의 도시들이 지중해 무역에만 정신이 쏠려 있을 때 이베리아반도는 대서양으로 눈을 돌렸다. ‘엔리케’ 이후 ‘주앙 2세’의 명을 받은 ‘바르톨로뮤 디아스’는 1488년 아프리카 남쪽 끝에 있는 희망봉을 발견하고, 10년 후 ‘바스코 다 가마’는 희망봉을 돌아 인도의 남서부 ‘캘리컷’에 도착한다.
  
  다윈이 살아생전에 설명하기 어려워 했던 공진화(coevolution)라는 개념이 있다. 한 생물 집단이 진화하면서 이와 관련된 다른 생물 집단도 함께 진화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숙주와 기생 생물의 관계, 상리 공생을 하는 생물의 관계 등이 공진화의 사례이다.

  ‘엔리케’를 필두로 시작된 대항해시대의 서막은 앞서가는 ‘포르투갈’과 쫓아가는 ‘스페인’으로 첫 장면이 시작된다. 동방무역의 독점으로 엄청난 수익을 올리는 포르투갈을 본 스페인은 자극을 받아 신항로 개척에 뛰어드는데, 이 시기는 그라나다를 거점으로 있던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는 ‘레콩키스타(국토수복운동)’가 완료되는 시기와 일치한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해양패권 분할은 경쟁적 공진화 관계를 이루며 점차 세력을 키워간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인정한 남미대륙 식민지 분할은 직선으로 경계선을 나누는 선례가 되는데, 이는 여전히 파문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가진 교황의 힘이 꽤 오랜 시간 계속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1077년 ‘카노사의 굴욕’으로 정점을 이룬 교황의 권위는 500년이 지난 대항해시대까지 계속된다.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으로 교황의 권위가 실추되긴 했지만, 800년이 지난 19세기 영국과 프랑스가 민족, 자연환경, 문화 등을 무시하고 직선으로 아프리카 나라들의 경계선을 그을 때까지 이 조약이 힘을 발휘한 것은 사실이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식민지를 지배하는 방식은 현저히 달랐는데, 식민지를 직접 통치한 스페인과 달리, 포르투갈은 항구중심의 상업적 교육에 초점을 둔다. 이는 포르투갈의 적은 인구로 많은 나라를 통치하기 위해 선택한 생존 전략이다. 포르투갈 사람은 현지인과 친해짐으로써, 즉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식민지배를 이어간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가 해상무역 경쟁에 참여하면서 포르투갈은 노예무역으로 상업 노선을 바꾸고, 무역의 독점권인 ‘아시엔토(Asiento)’를 행사하게 된다. 이는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유연한 적응으로 해석될 수 있다.
  
  대륙의 발견은 자원을 개발하기 위한 노동력을 채우기 위한 노예무역으로 이어지고, 바다의 돈벌이 수단에는 어김없이 나타나는 해적이란 존재가 다시금 대항해시대의 주역으로 등장한다. ‘바르바리 해적’이 대표적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레콩키스타’로 그라나다에서 쫓겨난 무어인들이 기독교인을 대적한 성전(지하드)을 시작하면서 해양의 역사에 등장한 세력이다.

  그리스 신화 속 신 디오니소스가 여러 섬을 정복하기 위해 돌아다니다 ‘튀레노이’ 해적에게 붙잡혔다가 사나운 해적들을 온순한 돌고래로 만들었다는 신화가 증명하듯, 해적은 유사 이래로 존재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카이사르가 해적에 사로잡혀 로도스섬에 갇힌 이야기에서, ‘돈키호테’의 세르반테스, ‘로빈슨 크루소’의 다이엘 디포에 이르기까지 해적에 잡혔던 유명인들의 많은 일화가 있다. 그만큼 해적은 바다의 역사와 함께해 왔고, 그로 인해 캐러비안의 해적, 보물섬과 같은 많은 낭만적인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15세기에서 18세기의 해적은 지중해 해안 도시국가들의 영주와 긴밀한 유착관계를 맺어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동시에 전쟁에서는 대신에 싸우면서 공생관계를 유지한다. 특히 16~18세기의 유럽은 내전이나 종교전쟁, 다른 지역과의 전쟁으로 시달려서 해적퇴치에만 전념할 수 없는 상황이라 오히려 상업적 평화협정을 맺고 지원금을 주는 것이 이득이었으므로, 많은 나라가 상리 공생의 관계를 만들어 갔다.

  공진화와 관련해 ‘붉은 여왕 효과’라는 것이 있다. 어떤 대상이 변화하더라도, 그 대상의 주변 환경과 경쟁 상대 역시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오히려 상대적으로 뒤처지거나 제자리에 머물고 마는 현상.

앨리스가 숨을 헐떡이며 붉은 여왕에게 묻는다. 
“계속 뛰는데, 왜 나무를 벗어나지 못하나요? 
내가 살던 나라에서는 이렇게 달리면 벌써 멀리 갔을 텐데.”

붉은 여왕은 답한다. 
“여기서는 힘껏 달려야 제자리야. 나무를 벗어나려면 지금보다 두 배는 더 빨리 달려야 해.”

이렇듯 포르투갈과 스페인, 해적과 해양도시국가의 관계는 공진화의 모습을 매우 닮았다. 경쟁하며 발전해 간다. 때론 소모적이긴 하지만, 동시에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5. 대항해시대의 유산

  역사에는 항상 명암이 존재하는데, 그 밝음이 클수록 어둠 또한 짙다. ‘대항해시대’라는 단어가 보여주듯 이 단어에는 유럽인들의 뿌듯함과 자신감, 정복에 대한 정당화가 느껴진다. 1992년 스페인 세비야에서 벌어진 ‘신대륙 발견 500주년’ 행사와 그에 대항해 펼쳐진 ‘500년간의 수치’라는 아픈 역사청산 요구는 시대의 영광과 동시에 아픔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아메리카 대륙의 정복 이후 유럽 문명은 세계 문명의 표준이 되었다. 지금 전 세계 제도의 토대를 이루는 법, 의복, 종교, 언어, 생활방식이 유럽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정복의 정당화에 대한 또 다른 근거가 된다. 그러나,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과 발견의 치욕적 의미에 주목하는 ‘아프리카인에 대한 보상과 본국 귀환을 위한 세계 진상조사 위원회’는 500년간 서구가 ‘문명’의 이름으로 행한 ‘야만’적 행위를 계산하여 777조 달러를 배상금액으로 제시했다. 
  
  총, 칼을 앞세운 정복자들에 의해 신대륙은 철저한 문명파괴와 전통사회의 붕괴, 인구감소를 겪었다. 인구 8000만이 100만으로 줄어드는데, 150년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총, 칼보다 더 무서운 보이지 않는 질병이 함께 했음을 또한 알려준다. 단 600명으로 ‘아즈텍문명’을 파괴한 코르테즈의 힘은 인디오만 골라서 죽였던 천연두에서 나왔고, 이는 정복을 정당화하는 신의 힘으로 인식되어 인디오들을 더 이상의 저항이 불가능한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각종 물자수탈, 노예무역, 전염병으로 인한 문명의 파괴로 이어진 대항해시대의 결과는 지금까지 여러 가지 형태로 그 존재가 남아 있다. 정복자들과 원주민 인디오 간에 태어난 메스티소라는 새로운 혼혈인종은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의 최대 인구층을 형성하고 있다. 언어 또한 남미대륙의 서쪽을 점령했던 지역은 스페인어가, 동쪽인 브라질은 포르투갈어가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쓰이고 있다.

  대항해시대의 원양항해는 오늘날 금융시장의 토대를 이루는 주식·보험·은행 등 금융 제도들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동방무역은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는 동시에 상당한 위험이 따르는 사업이므로, 거대한 자본이 필요할 수밖에 없고, 이는 여러 투자를 증명할 수 있는 유가증권인 주식의 기원이 된다. 또한, 항해 중 사고를 책임지는 해상보험의 발전은 오늘날 보험제도의 토대가 된다. 오늘날 유명한 ‘로이드(Lloyd’s)는 해상보험 인수인이 출입하는 영국의 커피점이었는데 이들 보험 인수인들도 ‘로이드’라고 불리게 된다. 한편, 다수의 투자자로부터 모은 돈을 관리하기 위한 조직이 필요한데, 이것은 자연스럽게 오늘날 은행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나는, 이따금 거래를 위해 은행을 찾은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후추를 찾아 떠난 500년 전 유럽인들의 도전을 본다.

Mov Education 송병민
minaryhous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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