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기간, 엔비디아의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가 이재명 대통령을 만나 차세대 인공지능(AI) 반도체 '블랙웰' GPU 26만 장을 한국 정부와 국내 기업에 공급하겠다고 약속했으나, 불과 이틀 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최첨단 칩은 미국 외에는 누구도 갖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발언해 국내 산업계에 큰 혼선과 우려를 낳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일(현지시간) 미국 현지 방송 인터뷰에서 엔비디아의 최신 GPU에 대해 언급하며 "갓 출시된 새로운 블랙웰 칩은 다른 모든 칩보다 10년 앞서 있습니다. 우리는 그 칩을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습니다"라고 강하게 선언했다. 이 인터뷰는 젠슨 황 CEO가 한국에 대규모 GPU 공급을 약속했던 시점과 맞물려 파장을 키웠다.
해당 발언은 엔비디아 GPU의 중국 수출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으나, "미국만 쓰겠다",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겠다"는 표현이 워낙 단호하여 미국 정부가 한국에 대한 GPU 공급까지 막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국내 산업계에서 즉각 불거졌다. 특히 한국에 공급될 26만 장에는 최신 기술이 집약된 GB200 그레이스 블랙웰과 같은 최첨단 제품이 다수 포함될 것으로 알려져 논란의 무게를 더했다.
한국 정부 및 삼성, SK, 현대차, 네이버클라우드 등 엔비디아와 'AI 동맹'을 맺고 GPU 공급을 약속받은 국내 기업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상황을 예의 주시하면서도, 당장 공급 약속이 철회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신중하게 분석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양해각서(MOU) 단계이긴 하지만 엔비디아가 일방적으로 약속을 깨기에는 대외 신뢰도 문제가 크다"며, "구체적인 행정 조치가 구체화되기 전까지는 GPU 공급이 철회되었다고 단정하기는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밝혔다.
다수의 전문가들 역시 트럼프 대통령의 강경 발언이 한국 등 핵심 우방국보다는 중국을 겨냥한 강력한 견제 메시지일 가능성이 크다고 해석했다. 한 반도체 전문가는 엔비디아가 한국의 제조 인프라와 피지컬 AI(로봇, 자율주행 등 AI가 물리적 움직임을 구현하는 분야) 분야에서의 기술력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기에, 미국 정부도 동맹국인 한국에 대한 수출 통제를 무리하게 강행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의 인터뷰도 "엔비디아 최첨단 칩의 중국 판매를 허용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젠슨 황 CEO가 한국 방문 당시 한국을 "소프트웨어, 제조, AI 역량을 모두 갖춘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산업화 국가"라고 극찬하며 GPU 대량 공급을 약속한 만큼, 한국의 AI 경쟁력 강화에 대한 엔비디아의 전략적 판단은 확고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현재로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 대선 국면을 염두에 둔 정치적 수사 또는 중국에 대한 강력한 압박의 성격이 강하다는 해석이 우세하다. 그러나 미국 정부가 대중(對中) 반도체 제재의 수위를 높이면서 최첨단 GPU의 '최종 사용자(End-User)'를 까다롭게 심사하는 추세인 만큼, 향후 미 행정부 차원에서 한국 기업에 대한 블랙웰 공급을 제한하는 구체적인 행정 조치가 나올지에 촉각이 곤두서고 있다. 특히 미국 정부가 우방국에게도 첨단 AI 기술 및 장비의 수출을 까다롭게 통제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어, 국내 기업들은 GPU 공급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다각적인 외교적, 사업적 노력을 병행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