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가능성을 시사하며 '핵보유국' 지위를 전제 조건으로 내걸었다. 2기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처음으로 나온 대미 전략 방침에서 남측은 철저히 배제하겠다는 이른바 '통미봉남' 의사를 명확히 함에 따라, '한반도 운전자'를 자처했던 이재명 정부의 외교적 입지가 중대 기로에 섰다. 북한이 대화의 문을 여는 동시에 판을 흔들면서, 이재명 대통령이 제시한 '핵동결' 해법은 시험대에 올랐다.
김 위원장은 지난 21일 최고인민회의 연설을 통해 "미국이 허황한 비핵화 집념을 털어버리고 현실을 인정한다면 마주 서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좋은 추억"을 언급하며 개인적 유대를 과시했지만, 대화의 전제는 '비핵화 불가'라는 점을 분명히 못 박았다. 이는 오는 10월 말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트럼프 대통령의 참석이 확정된 직후 나온 발언으로, 사실상 북미 정상회담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으로 풀이된다.
반면 남측을 향해서는 "결단코 통일은 불필요하다"며 "일체 상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과거 북미 대화 국면에서 중재자 역할을 했던 남한의 존재를 의도적으로 지우고, 미국과 직접 담판을 짓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는 "과거 문재인 정부와 달리 트럼프 대통령과 직접 소통이 가능한 현 상황에서 북한이 이재명 정부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북한의 이러한 태도는 이재명 정부가 대북 정책을 펼칠 공간을 극도로 위축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복잡한 국면 속에서 이 대통령이 최근 영국 BBC 인터뷰에서 밝힌 '현실적 대안으로서의 핵동결' 구상은 더욱 큰 딜레마에 빠졌다. 이 대통령은 "비핵화라는 장기 목표를 포기하지 않는 한, 북한이 핵 개발을 중단하는 것만으로도 이익"이라며 동결을 임시 조치로 제안했다. 그러나 북한이 '핵보유국 인정'을 대화의 입구로 삼는 상황에서 '핵동결' 논의는 자칫 북한을 사실상의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핵동결 논의는 비핵화의 첫 단추부터 어그러뜨릴 수 있다"며 한미가 '북핵 원팀'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결국 공은 미국으로 넘어갔다. 트럼프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 등 개인적 동기를 바탕으로 비핵화 원칙을 잠시 접어두고 김 위원장과의 '깜짝 회동'에 나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이는 수십 년간 유지된 한미 동맹의 대북 정책 근간을 흔드는 위험한 도박이 될 수 있다. 북한의 계산된 '벼랑 끝 전술'에 이재명 정부가 외교적 고립을 자초하지 않으면서 국익을 지켜낼 수 있을지,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하고 정교한 외교력이 요구되는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