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경기 둔화와 중국발(發) 공급 과잉에 따른 경쟁 심화로 수익성 악화에 직면한 LG그룹이 창립 이래 가장 강도 높은 수준의 "위기 경영" 기조를 공식화하며 대규모 쇄신 인사를 단행했다. 그룹의 핵심 축인 LG전자와 LG화학의 최고경영자(CEO)를 교체하고 임원 승진 규모를 두 자릿수로 대폭 축소한 이번 인사는, 구광모 회장의 "변화는 생존의 문제"라는 강한 위기 의식이 반영된 결과로 풀이된다. 단순한 세대교체를 넘어 현장과 기술에 정통한 사업가형 리더를 전면에 배치하고, 인공지능(AI), 바이오, 클린테크(ABC) 등 미래 성장 분야에 대한 투자를 가속화함으로써 위기를 돌파하겠다는 전략적 의지가 엿보인다.
LG그룹은 11월 27일 발표한 2026년 정기 임원 인사에서 전체 승진자 규모를 전년 대비 약 19% 줄인 총 48명으로 확정했다. 특히 그룹 전체의 조직 운영 효율화를 위해 지주사 격인 ㈜LG의 2인 부회장 체제를 권봉석 부회장 단독 체제로 전환했다. 신학철 LG화학 부회장이 용퇴함에 따라 그룹 컨트롤타워의 의사 결정 구조를 간소화하여 경영 속도를 극대화하겠다는 명확한 목표를 제시한 것이다. 이러한 조직 슬림화는 그룹 전반에 걸쳐 비효율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핵심 역량에 집중하겠다는 구 회장의 의중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이번 인사의 핵심은 주력 계열사의 수장 교체이다. LG전자는 생활가전(HS)사업본부를 이끌며 탁월한 성과를 입증한 류재철 사장이 신임 CEO로 선임됐다. 류 사장은 가전 분야의 견고한 글로벌 1위 DNA를 전사로 확산하고, 전장(VS) 및 냉난방공조(HVAC) 등 미래 성장 동력인 B2B(기업 간 거래) 사업의 질적 성장을 주도할 임무를 맡게 되었다. LG화학 역시 첨단소재사업본부를 이끌던 김동춘 사장이 신임 CEO로 발탁됐다. 김 사장은 양극재 등 미래 핵심 소재 사업의 경쟁력 확보와 고부가 사업으로의 포트폴리오 고도화라는 막중한 과제를 안게 되었다. 두 신임 CEO 모두 현장 경험이 풍부하고 기술 중심의 혁신을 추진해 온 "기술형 사업가"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 당면한 경쟁 압력을 기술 격차로 돌파하겠다는 그룹의 전략을 뒷받침한다.
이처럼 강도 높은 쇄신 배경에는 지난 수년간 이어진 주요 계열사의 실적 부진과 중국발 경쟁 심화가 자리한다. 가전 부문은 중국 업체들의 저가 공세와 기술 추격으로 수익성이 악화되고 있으며, 2차전지 및 석유화학 등 화학 부문 역시 글로벌 수요 부진과 공급 과잉으로 이익 체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구광모 회장이 지속적으로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위기 의식을 강조해 온 점은, 이번 인사가 단순히 연례적인 정기 인사가 아니라 생존을 건 구조 조정에 가깝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룹의 주요 일곱 개 계열사 합산 영업이익률이 0%대에 머무는 현실은 근원적인 체질 개선 없이는 지속 가능한 성장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린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다만, 조직 축소와 인력 효율화 기조 속에서도 미래 사업 분야 인재 발탁에는 예외적으로 과감한 투자를 이어갔다. 올해 신규 임원 중 21%가 AI, 바이오, 클린테크(ABC) 및 연구개발(R&D) 인재로 채워졌으며, 특히 최연소 상무, 전무, 부사장 승진자는 모두 AI 전문가가 차지했다. 이는 LG가 자체 개발한 초거대 AI "X4(엑스포)"를 중심으로 전 계열사의 AI 전환(AX)을 가속화하고, 기술 패권 경쟁에서 주도권을 놓치지 않겠다는 명확한 전략적 의지를 보여준다. 또한 80년대생 임원을 전진 배치하여 조직의 민첩성을 높이고 기술 변화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역동적인 리더십을 구축하려는 의도도 담겨있다.
지주사 ㈜LG 역시 올해 매출과 영업이익이 큰 폭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안정적인 재무 기반 위에서 그룹의 "선택과 집중" 전략에 더욱 힘이 실릴 전망이다. LG그룹은 이번 인사를 기점으로 수익성이 낮은 한계 사업은 과감히 정리하고, 미래 먹거리인 ABC 분야에는 속도감 있는 투자를 단행하며 사업 포트폴리오를 근본적으로 개편할 계획이다. 재계 일각에서는 갑작스러운 세대교체와 조직 슬림화가 당장의 내부 안정성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지만, 글로벌 경쟁 환경의 격화 속에서 LG의 고강도 쇄신이 실질적인 경쟁 우위 확보와 장기적인 성과 창출로 이어질지 업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이와 같은 근원적 변화 시도는 LG그룹이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지 가늠하는 중대한 시험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