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한 곡의 노래가 사람보다 먼저 기억을 찾아오는 순간이 있다.
SBS ‘우리들의 발라드2’를 바라보며 나는 문득 오래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한 사람과, 그 사람과 함께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화면 속에서 오래된 발라드가 흐르는 순간, 지금의 나는 잠시 사라지고 그 시절의 내가 다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와 함께 바라보았던 화면, 함께 들었던 노래, 별것 아닌 이야기에도 웃었던 순간들.
그때는 몰랐다. 그것이 그렇게 소중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사람은 이상하게도 곁에 있을 때보다 떠난 뒤에 더 많은 것을 깨닫는다. 함께 밥을 먹는 일, 전화를 기다리는 일, 늦은 밤 “잘 자”라는 한마디를 건네는 일조차 사실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은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평범한 하루를 함께 살아가는 일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평범함의 가치를 너무 늦게 배운다.
‘우리들의 발라드2’를 보면서 다시 느꼈다. 발라드는 단순히 오래된 노래가 아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고, 한 시절의 사랑이며,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순간을 잠시 불러오는 기억의 문이다.
어떤 노래에는 첫사랑이 살고 있고, 어떤 노래에는 부모님의 젊은 날이 남아 있다. 그리고 어떤 노래 속에는 끝내 잡지 못했던 한 사람이 살아 있다.
그래서 사람은 노래 앞에서 때때로 무너진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얼굴이 떠오르고,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던 마음 한구석이 다시 먹먹해진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그리워한다고 해서 반드시 돌아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했던 사람을 기억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붙잡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때로 가장 깊은 사랑은 보내주는 것이고, 가장 오래 남는 사랑은 좋았던 기억을 더럽히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때 정말 사랑했다면 그 사람의 행복을 바랄 수 있어야 한다.
내 옆이 아니더라도 잘 지내기를, 아프지 않기를, 좋은 사람들과 많이 웃으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은 사랑의 패배가 아니라 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이 마지막으로 지킬 수 있는 마음의 품격일 것이다.
나 역시 지난 시간을 돌아본다.
잘해주지 못했던 순간도 있었고, 상처를 주고받았던 날도 있었다. 조금만 더 이해했더라면, 조금만 더 기다려주었더라면, 조금만 더 따뜻한 말을 건넸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도 남는다.
하지만 인생에는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 있다.
그렇기에 후회 속에서 살아가기보다 그 시간을 통해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남겨진 사람의 몫이다.
이제 그와 함께했던 시간을 원망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다.
함께 웃었던 날도 진짜였고, 서로 사랑했던 마음도 진짜였으며, 우리의 인생 한 페이지를 함께 써 내려갔던 사실 역시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면 충분할지도 모른다.
오늘도 어디선가 오래된 발라드가 흐른다.
그리고 그 노래는 말한다.
사람은 떠나도 함께했던 시간까지 떠나는 것은 아니라고.
언젠가 세월이 더 흐른 뒤 우연히 같은 노래를 다시 듣게 된다면, 그때는 아픔보다 미소가 먼저 떠오르기를 바란다.
“그때 우리 참 많이 사랑했구나.”
그 한마디만 마음속으로 할 수 있다면, 지나간 사랑 역시 실패한 사랑만은 아닐 것이다.
사랑은 반드시 함께 살아야만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서로의 인생에 잠시 머물다 떠나면서도 평생 잊지 못할 따뜻한 기억 하나를 남긴다.
그리고 그 기억은 우리가 힘든 어느 날, 오래된 노래 한 곡을 타고 다시 찾아와 조용히 어깨를 두드린다.
괜찮다고.
당신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누군가와 함께한 아름다운 계절이 분명히 있었다고.
오늘 나는 그 시절을 미워하지 않기로 한다.
그리운 사람을 억지로 잊으려고도 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함께했던 소중한 시간에 감사하며, 서로가 각자의 자리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라기로 한다.
사람은 떠나도 노래는 남는다.
사랑은 지나가도 추억은 남는다.
그리고 어쩌면 그리움이란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한때 너무나 소중했던 사람에게 보내는 조용한 감사 인사인지도 모른다.
이명기
한국미디어일보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