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앞에서 감독의 지시를 받던 배우들이 카메라 뒤로 자리를 옮겼다. 이정재와 정우성, 하정우, 김윤석, 조은지, 유지태 등 오랜 연기 경력을 쌓은 배우들이 직접 각본을 쓰거나 연출에 뛰어들면서 배우 출신 감독은 더 이상 충무로에서 낯선 존재가 아니다.
배우에서 감독으로 영역을 넓힌 대표적인 인물은 이정재다. 이정재는 2022년 영화 "헌트"로 장편영화 감독에 데뷔했다. 배우 생활 약 30년 만에 직접 각본 작업과 연출에 참여한 작품이다.
"헌트"는 조직 내 숨어든 스파이를 색출해야 하는 안기부 요원 박평호와 김정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 첩보 액션 영화다. 이정재가 박평호를 연기했고 오랜 동료인 정우성이 김정도 역을 맡았다. 이 작품은 제75회 칸국제영화제 미드나이트 스크리닝 부문에 초청돼 처음 공개됐다.
이정재와 여러 작품에서 호흡을 맞춘 정우성도 감독으로 장편영화를 내놨다. 2023년 개봉한 "보호자"다. 정우성은 연출뿐 아니라 주인공 수혁을 직접 연기했다. 10년 만에 출소한 남자가 자신에게 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액션 장르에 담았다.
하정우는 이들보다 앞선 2013년 "롤러코스터"로 장편 상업영화 연출에 도전했다. 한류스타가 탑승한 비행기가 악천후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코미디로 풀어낸 작품으로 정경호가 주연을 맡았다. 부산국제영화제에도 공식 초청되면서 배우 하정우와 다른 감독으로서의 첫 결과물을 관객에게 선보였다.
하정우는 이후 2015년 "허삼관"에서 연출과 주연을 동시에 맡았다. 배우 활동을 유지하면서 한 번의 경험에 그치지 않고 다시 메가폰을 잡았다는 점에서 다른 배우 출신 감독들과 차이를 보였다.
김윤석은 2019년 "미성년"을 통해 감독으로 데뷔했다. 부모의 불륜을 알게 된 두 여고생과 두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김윤석은 공동 각본과 연출을 맡으면서 극 중 대원 역으로 출연해 연기까지 병행했다.
흥미로운 대목은 김윤석이 당시 하정우의 연출 경험을 직접 언급했다는 점이다. 그는 "허삼관"에서 연출과 주연을 함께 맡았던 하정우를 보며 존경하게 됐다고 말했다. 직접 감독과 배우를 동시에 경험해 보니 두 역할을 병행하는 부담을 체감했다는 설명이었다.
조은지도 배우 생활을 이어오면서 연출 작업을 꾸준히 준비했다. 단편영화 "2박 3일"을 연출한 데 이어 2021년 "장르만 로맨스"로 장편영화 감독에 데뷔했다.
"장르만 로맨스"에는 류승룡과 오나라, 김희원 등이 출연했다. 제작보고회 당시 류승룡은 조은지의 연기 디렉션을 두고 신인 감독답지 않게 정확했다는 평가를 내놓기도 했다. 배우로서 현장에서 쌓은 경험이 다른 배우에게 연기를 주문하는 과정으로 연결된 사례다.
유지태는 배우 출신 감독 가운데 비교적 일찍 연출 작업을 시작했다. "자전거 소년", "나도 모르게", "장님은 무슨 꿈을 꿀까요" 등 여러 단편을 연출한 뒤 2013년 "마이 라띠마"로 첫 장편영화를 내놨다.
"마이 라띠마"는 한국에 국제결혼으로 들어온 태국 여성과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난 남자의 삶을 그렸다. 작품은 국내 개봉에 앞서 도빌아시아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다. 유지태는 대학 시절부터 해당 시나리오를 구상하며 장기간 연출을 준비한 것으로 알려졌다.
배우 출신 감독들의 작품은 한 방향으로 묶이지 않는다. 이정재는 첩보 액션을 선택했고 정우성은 액션과 가족 이야기를 결합했다. 하정우는 코미디로 첫 연출에 나섰으며 김윤석은 두 가족과 청소년의 관계를 파고들었다. 조은지는 관계와 로맨스를, 유지태는 사회 주변부 인물들의 삶을 카메라에 담았다.
공통점은 오랜 기간 촬영 현장에서 배우로 활동했다는 것이다. 배우는 시나리오를 해석하고 감독의 주문을 받아 캐릭터를 완성하는 위치에 있지만 감독이 되면 각본과 촬영, 배우의 연기, 편집 등 영화 전체를 책임져야 한다. 김윤석이 감독 데뷔 당시 "한 컷까지 계속 신경이 쓰인다"고 말했던 것도 이런 역할 변화와 맞닿아 있다.
배우의 감독 도전이 반드시 일회성 외도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단편부터 연출 경험을 쌓은 유지태처럼 장기간 감독 데뷔를 준비한 경우가 있고, 하정우처럼 장편 연출을 이어간 사례도 있다.
관객에게 익숙한 얼굴이 감독이라는 이유만으로 영화의 완성도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배우로 쌓은 이름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이야기를 어떻게 영화의 언어로 바꿔내느냐가 평가 기준이 된다. 배우와 감독의 경계를 넘는 시도가 계속되는 가운데 이들의 다음 작품이 연기자인 동시에 창작자로서 어떤 색깔을 보여줄지가 남은 관심사다.
이수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