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계약을 체결한 상태라 하더라도 실제 업무를 수행하지 않았다면 사용자에게 임금을 요구할 수 없다는 대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3부(주심 이흥구 대법관)는 전북 익산의 전 YMCA 사무총장 A씨가 전직 이사장들을 상대로 낸 임금 청구 소송에서 원고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전주지방법원으로 환송했다고 11일 밝혔다.
재판의 쟁점은 실제 근로 제공 여부와 임금청구권의 상관관계였다. A씨는 2010년 12월 부임 당시 2023년까지 근무하기로 계약했으나, 2017년부터 재정 악화로 임금을 받지 못하자 소송을 제기했다. 이후 2020년 12월 양측은 체불 임금 9900만 원 지급과 2021년 12월까지 재직 후 법적 조치를 취하한다는 내용의 확약서를 작성했다. 그러나 A씨는 약속된 금액 중 일부를 받지 못했다며 다시 소송을 냈다.
이사장들은 재판 과정에서 조직이 사실상 와해된 2017년 8월 이후 A씨가 실제 근무를 하지 않았다고 맞섰다. 1심과 2심은 실제 근로 제공이 임금 청구의 절대적 요건은 아니라며 A씨의 손을 들어줬다. 근로계약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면 일을 하지 않았더라도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대법원의 해석은 달랐다. 재판부는 근로자의 임금청구권은 기본적으로 근로를 제공해야 발생하는 권리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근로계약 기간이 남아 있더라도 실제 근로를 제공하지 않았다면 임금청구권을 가질 수 없다는 논리다. 대법원은 원심이 근로 제공 여부에 대한 실질적인 심리 없이 임금 지급 의무를 인정한 점이 잘못됐다고 보았다.
확약서에 명시된 재직 기간의 의미도 새롭게 해석됐다. 대법원은 2020년 작성된 확약서에서 재직 기간을 2021년 12월까지로 정한 만큼, 당초 2023년까지였던 근로계약은 확약서에 따라 종료된 것으로 볼 여지가 상당하다고 판단했다. 기간 연장이 아닌 계약 종료 시점의 재설정으로 본 것이다.
이번 판결은 근로계약서의 존재보다 실질적인 업무 수행 여부를 임금 지급의 우선 기준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대법원은 환송 후 재판부에서 A씨가 주장하는 기간 동안 실제로 사무총장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했는지, 조직 와해 이후 근로 제공이 불가능했던 상황이었는지 등을 다시 확인하도록 했다.
법조계에서는 이번 판결이 향후 유령 근로자나 직무 정지 상태에서의 임금 청구 소송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계약의 형식적 유지보다 근로의 실질적 제공이라는 원칙을 강화함에 따라 임금 지급을 둘러싼 입증 책임과 심리 범위가 더욱 구체화될 전망이다.
근로 제공이 중단된 배경이 사용자의 귀책 사유인지, 아니면 근로자의 자발적 이탈이나 조직 소멸 때문인지에 대한 사실관계 확정은 향후 파기환송심의 핵심 과제가 됐다. 이번 대법원 판결로 근로계약과 임금 지급 사이의 대가 관계를 둘러싼 법리 논쟁은 다시 원점에서 다투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