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사고 피해자가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에 조정을 신청하고도 의료기관의 참여 거부로 심의 절차조차 밟지 못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최근 3년 9개월 동안 접수된 의료분쟁 조정·중재 신청 가운데 약 34%가 각하됐으며, 각하 사유의 대부분은 피신청인의 참여 거부로 집계됐다.
19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소병훈 의원이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23년부터 올해 9월까지 접수된 의료분쟁 조정·중재 신청은 모두 9,943건이다. 이 가운데 6,350건은 조정절차가 개시됐지만 3,409건은 각하 처리됐다.
각하 건수는 최근 들어 증가했다. 2023년 707건이었던 각하 건수는 2024년 689건으로 소폭 감소했으나 지난해 900건으로 늘었다. 올해는 9월까지 1,113건이 각하돼 이미 지난해 연간 건수를 넘어섰다.
조정절차가 시작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의료기관 등 피신청인의 불참이었다. 전체 각하 사건 3,409건 중 3,377건이 피신청인의 참여 의사가 없다는 이유로 종결됐다. 비율로는 99.1%에 달한다. 신청기간 초과나 별도 소송 제기 등 다른 사유로 각하된 사건은 32건이었다.
일부 의료기관에서는 조정 신청이 반복적으로 접수됐지만 대부분 절차가 개시되지 않았다. 의원급 의료기관 한 곳은 접수된 9건이 모두 각하됐고, 다른 의원에서는 12건 중 11건이 각하됐다. 병원급 의료기관 3곳에서도 접수된 조정 신청이 전부 각하된 사례가 확인됐다. 상급종합병원 중에는 38건의 신청 가운데 23건이 각하된 곳도 있었다.
의료기관 규모에 따라서도 차이가 나타났다. 의원급 의료기관은 조정 신청 2,681건 중 1,271건이 각하돼 47.4%의 각하율을 기록했다. 반면 상급종합병원은 1,477건 중 331건이 각하돼 22.4%로 집계됐다. 의원급의 각하율이 상급종합병원보다 두 배 이상 높았다.
진료과목별로는 성형외과가 55.7%로 가장 높은 각하율을 기록했다. 피부과 48.9%, 안과 45.3%가 뒤를 이었다. 각하된 사건의 절대 건수는 정형외과가 654건으로 가장 많았다. 다만 각하율은 의료사고 발생률이나 의료과실 인정 비율을 나타내는 지표와는 구분해야 한다.
의료분쟁 조정제도는 환자와 의료기관이 소송에 앞서 전문적인 감정과 조정을 통해 분쟁을 해결하도록 마련된 절차다. 그러나 현행 제도에서는 사망이나 중증장애 등 법률에서 정한 일부 자동개시 사건을 제외하면 피신청인의 참여 의사가 절차 개시를 좌우한다. 의료기관이 참여를 거부할 경우 의료행위의 적정성이나 손해배상 책임에 대한 판단 없이 신청이 종료될 수 있다.
이 같은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지난 5월 의료분쟁조정법이 개정됐다. 개정법은 조정 자동개시 대상을 경증장애와 고위험 필수의료행위 관련 사건 등으로 확대하고, 피신청인이 14일 이내에 불응 의사를 표시하지 않으면 조정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하는 내용을 담았다. 시행일은 2027년 5월 27일이다.
다만 법 개정 이후에도 모든 의료분쟁에 자동개시가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자동개시 대상에서 제외된 사건은 피신청인이 명시적으로 참여를 거부하면 조정이 성립되기 이전에 절차가 끝날 수 있다. 조정 신청을 반복적으로 거부하는 의료기관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제도의 실효성을 확보할 것인지가 남은 쟁점이다.
소병훈 의원은 “의료사고 피해자가 어렵게 조정을 신청했는데 상대방이 참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절차조차 시작하지 못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며 “내년 개정법 시행을 계기로 반복적인 조정 불참 문제를 면밀히 살피고, 피해자가 신속하게 구제받을 수 있도록 정부와 중재원이 노력해야 한다”고 밝혔다.
개정법 시행까지는 약 7개월이 남았다. 의료기관의 조정 참여 여부에 따라 피해구제 절차가 중단되는 현행 구조에서 자동개시 범위 확대가 실제 각하 건수를 얼마나 줄일 수 있을지, 반복적인 참여 거부에 대한 관리 기준을 어떻게 마련할지가 제도 시행의 핵심 과제로 남아 있다.
이수민 기자